패션계의 거장들 3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와 크리스티앙 디오르 그리고 피에르 발맹 - 무료 사주 및 꿈해몽 모음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1895~1972)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스페인의 어촌 게타리아에서 태어난 20세기 모드계의 거장, 정원사였떤 아버지와 재단사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소년 시절 카사 트레스 후작부이느이 슈트를 카피해 만들어 본 것을 계기로 패션 디자니어가 되었다.


    1915년 산 세바스찬에 메종을 열었다. 128년 마드리드로 옮기고 다시 바르셀로나 지점을 세울 정도로 번창 하였으나, 내란으로 모든 것을 잃고 런던을 거쳐 파리로 이주하였다. 1937년 조르주 샹크 거리에 메종 [발렌시아가]를 창설, 같은 해 가을 파리 모드계에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1938년 게피에르 룩을 발표하며 제 2차 세계 대전이후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선부인 뉴 룩의 도래를 예고 하였다. 물자가 부족하던 세계대전당시의 전후 사회에서 일련의 검은 드레스를 여러 개의 다양한 타입으로 디자인한 진주 목걸이를 곁들인 호화스런 의상을 선보이면서 침체된 모드계에서 새바람을 일으키며 선풍적인 유행을 이끌었따. 


    1948년 슬림 실루에스이 패널 스커트

    1950년 배럴 룩으로 웨이스트를 해방시키고

    1951년에는 스트레이트한 오버 블라우스나 스목 룩의 슈트, 오프넥 칼라 및 스웨터 룩으로 된 미디 슈트, 1952년 루스 피트 룩, 1953년 폴로 슈트, 1955년 호리호리한 튜닉, 1957년에는 색 드레스라 불리는 슈미즈 드레스 등을 연달아 발표해 왕성한 디자인 의욕을 보였다. 같은 기간 동안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여성스런 로맨틱 모드를 발전 시킨데 비해, 그는 오로지 심플리시티를 고집하고 사회 생활의 인포멀화에 대응하는 스포티한 라인을 개척해 나갔다. 


    생전의 크리스티앙 디오르나 파투를 발렌시아가는 파리의 최고 디자이너로 대접하고 열렬히 응원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내성적이면서 폐쇄적인 성향이 짙었으며, 급진 주의자와 저널리스트의 횡포를 싫어하여 1956년 이후에 자신의 작품은 일체 저널리스트에게는 선보이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런데도 신문과 잡지 에서는 그에게 [디자이너의 제왕] 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1968년 파리 5월 혁명 후에 그는 갑자기 30여년의 전통있는 메종을 폐쇄하고, 73세로 애석학도 은토하여 골동품을 취마삼아 나날을 보냈다.

    1972년 스페인의 고 프랑코 장군의 손녀를 위한 웨딩 드레스의 제작을 마지막 작품으로 사망하였다. 제자로서는 쿠레즈와 웅가루고 있으며, 지방시도 큰 영향을 받았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 1905~57)

    프랑스 노르망디 그랑빌의 실업가 아들로 태어났다. 외교관 지망생이었던 그는 부친의 사망 후 화랑을 경영 하면서 틈틈이 모자 디자인을 스케치하곤 햇다. 그 스케치가 주위의 호평을 받게 된 것을 계기로 디자이너로 입문 했다. 1938년 부터 피게, 르롱 등의 메종에서 일하다가 1946년 독립하여 [크리스티앙 디오르] 메종을 박졸했다. 그가 데뷔작으로 발표한 것이 화관 라인 이다. 


    둥근 모양의 완만한 어깨, 가늘게 죄인 웨이스트, 풍성한 플레어를 살린 롱 스커틀로 구성된 이 새로운 스타일은 전쟁중의 모드로부터 전환을 갈망하던 당시 사회에 [뉴 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자체는 회고조인 것이었으나 억압되었던 모드 활동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 뉴 룩의 대성공으로 그 후 10년간 디오르는 세계 모드를 주도했다.그는 파운데이션을 이용해 실루엣을 뚜렷하게 그려내는 방법을 취했으나 모두 둥글고 자연스러운 어깨선을 유지했다. 1950년에는 볼륨을 상체에 집중시키는 [버티컬 라인]을 ,1951년 봄에느 처음으로 웨이스틀 해방시킨 [오벌 라인] 작품도 전시했다. 1952년 봄의 [시뉴어스 라인]은 전면적으로 웨이스트를 해방시킨 소프트한 라인이였다. 1953년에는 [튤립 라인] 을 잇달아 발표했다. 

    1954년 가을의 [H 라인]을 발표하면서 우아함을 고집하던 태도를 바꿔 단순하고 직선적인 경향을 보여 A라인,Y라인 까지 그런 스타일이 계속되었다.


    1956년 봄에는 [에로 라인]으로 엘레강스한 멋을 추구, 다시 예전의 디오르다운 면모를 되찾기 시작했다. 특히 18세기 카라코를 발전시켜 블라우스나 드레스와 콤비네이션시켜 입는 방버을 보여주었다. 이 무렵 드레스와 같은 천으로 만든 밤의 펌프스를 고안하고 손잡이가 긴 우산을 선보였다.

     

    1956년 [마그넷 라인]을 발표하고 1957년 [스핀들 라인]을 개발, 발표 준비를 하던 중 디오르는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화랑을 경영한 것을 계기로 모드 계에 진출했고 천부적인 재능으로 다양한 실루엣을 발표, 20세기 중엽 모드계를 이끈 거장 크리스티앙 디오르. 그의 일련의 알파벳 라인과 뉴 룩은 전후 세계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엘레강스 그것이 바로 패션이다]라는 개념을 확립했다. 


    그 밖에도 모드의 세계화, 기업화를 위한 발판을 구축했고 카르댕,이브생 로랑, 마르크 보앙 등 후진 양성에도 기여했다. 디오르사는 1960년대 중반 부터 프레타포르테에 진출했고 ,1966년 [미스 디오르] 및 모피부분에 이어 [디오르 베이비] [ 디오르 스포츠 ] 등을 잇달아 신설하였다. 


    피에르 발맹 (1914~82)

    피에르 발맹은 프랑스 알프스 산기슭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사복, 어머니는 부인복 부티크를 경영했다. 그는 파리의 국립예술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지만, 어느날 해질녘에 본 콩코드 광장의 개성을 지닌 귱형미에 깊은 감동을 받아 전공을 패션 디자인으로 전향 하였다. 그 후 몰리뇌의 제자가 되어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다가 잠시 르롱사의 모델리스트로 활약하기도 했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군에서 복무하다 휴전 후 어머니의 부티크에서 일을 거들었다.

     르롱의 부름을 받고 점령하의 파리로 되돌아가 그때 신입사원이었던 디오르와 함께 활약했다. 

     1945년 여름 어머니의 도움으로 프랑수아 프로미에가의 한 점포를 빌어 독립하고 그 해 가을에 완만한 어깨와 허리를 조인 풀 스커트의 게피에르 룩의 드레스와 브론드 색의 새틴에 검은 구슬을 수놓은 아름다운 이브닝 블라우스를 발표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산뜻한 노동자 룩의 블라우스를 내놓아 각광을 받았다.
    1957년 발표한 향수 [졸리 마담]은 대 성공이었다. 

    이후 그의 컬렉션에서 일관된 테마로 등장하게 되었다. 세련된 여행 의상, 우하하고 호화스러운 밤의 드레스나 품위있는 웨딩 드레스는 정평이 나있으며, 1950년 대에는 발렌시아가, 디오르와 함께 파리 모드계의 [스리 빅]의 한사람이 되었다.

    젋고 발랄한 모드가 붐을 이뤘단 1960년대에도 그는 여전히 전통적인 엘레강스 라인을 고수 하였다. 1970년대에는 그의 작품을 [졸리 마드모아젤]로 변화되었다. 영어로 집필한 자서전 [내가 살아온 계절]을 비롯해 파리의 의상조합학교에서 복식사를 강의하는 등 이론가로서의 학구적인 자세도 보여주었다. 1977년에는 프랑스 ㅓㅇ부가 수여하는 [레지옹 도뇌르]훈장을 받았다. 1982 6월 그가 타계하자 31년 동안 그의 보조디자이너였떤 에릭모르텐센이 후계자가되어 발맹사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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